증거로서의 임상시험
신약개발 현장에서는 종종 데이터가 스스로 말한다고 가정한다.
임상시험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고, p-value는 기준을 넘거나 넘지 못하며, 그래프는 설득력 있어 보이거나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FDA 승인 과정을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승인 여부는 단순히 데이터의 존재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데이터가 믿을 수 있는지가 문제다.
겉으로 보면 FDA 승인 과정은 과학적 절차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부에서 보면, 그 구조는 놀랄 만큼 법적이다. 이는 과학적 진실을 발견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증거가 제시되었는지를 평가하는 과정에 가깝다. 질문은 “결과가 나왔는가”가 아니라, “이 결과를 근거로 결정을 내려도 되는가”이다.
이 점에서 임상시험 데이터는 전형적인 전문가 증거에 해당한다. FDA 심사관은 임상시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실험을 직접 재현하지 않고, 보고서·표·통계 분석을 통해 현실을 간접적으로 접한다. 결국 FDA가 하는 일은 임상시험의 결과를 다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험이 인식적 신뢰(epistemic trust)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법원이 사건의 진위를 직접 확인하는 대신, 제출된 증거가 판단의 기초로 적합한지를 따지는 것과 정확히 닮아 있다.
그래서 첫 번째 관문은 효능이 아니라 정당성이다.
프로토콜에서 벗어난 시험, 결과를 본 뒤 변경된 endpoint, 부적절한 대조군을 가진 연구는 통계적으로는 인상적인 숫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데이터는 FDA의 판단 과정에 ‘증거’로 들어가기 어렵다. 문제는 데이터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가에 있다. 증거란 애초에 편향을 억제하도록 설계된 절차를 통해 생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숫자는 증거라기보다 주장에 가깝게 보인다.
이 맥락에서 사전 등록(preregistration)이 갖는 의미는 단순한 행정 요건을 훨씬 넘는다. 이는 본질적으로 증거법적 안전장치다. 가설과 endpoint를 미리 고정함으로써, 연구자는 결과를 본 뒤 유의미한 패턴을 ‘찾아내는’ 자유를 제한받는다. 법의 언어로 말하면, 이는 사후적으로 제조된 증거(post hoc evidence)를 방지하는 장치다. FDA가 프로토콜 일탈에 유난히 민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과학적 엄격함 이전에, 증거 생성 과정의 정직성을 묻는 문제다.
통계적 유의성 역시 종종 오해된다. p-value는 중요한 신호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증거력의 전부는 아니다. FDA가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효과의 크기, 임상적 의미, 그리고 다양한 하위집단과 반복 연구에서 나타나는 일관성이다. 이는 법정에서 단일 증거만으로는 부족하고, 서로 보강하는 증거들의 집합이 필요하다는 직관과 같다. 숫자가 ‘유의하다’는 사실보다, 그 숫자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묶이는지가 더 중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불리한 데이터의 처리다. 완벽해 보이는 임상 결과는 오히려 의심을 낳는다. 탈락자, 부작용, 실패한 하위 분석이 정직하게 보고되고 설명될 때, 전체 데이터의 신뢰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법의 세계에서도 불리한 증거를 숨긴 흔적은 전체 증거의 신빙성을 무너뜨린다. FDA 역시 같은 직관을 공유한다.
최근 들어 이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적응형 설계, 대리지표, AI 기반 분석은 효율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설명 가능성을 약화시킨다. 결과가 ‘왜’ 나왔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수록, 데이터는 점점 블랙박스처럼 느껴진다. 이 지점에서 FDA의 질문은 점점 과학적이라기보다 인지적이 된다. 이 결과는 판단자를 오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는가?
결국 FDA 승인에서 임상시험은 과학 데이터이기 이전에 판단을 정당화하는 증거다. 그 증거력은 통계 기법의 정교함보다, 데이터가 생성·선별·제시되는 구조에서 나온다. 이는 신약개발을 하는 사람에게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임상시험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제도적 설득의 과정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관점은 법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 규제, 기술, 그리고 신약개발 전반에 걸쳐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내리는 결정을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해하고 있다는 형식을 수행하고 있을 뿐인가. 이 에세이는 그 질문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음을 기록한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