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의 색이 바뀌듯, 삶의 채도를 높이는 ‘제3의 공간’
우리는 평생 ‘소속’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간다. 학생일 때는 학교의 이름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명함에 박힌 직함으로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 학교와 회사는 성취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터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를 특정한 틀에 맞춘다. 하지만 그 틀이 견고해질수록 인간 본연의 생동감은 때로 질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학교 밖, 회사 밖의 커뮤니티, 즉 ‘제3의 공간’이 절실하다.
태권도장은 그 공간이 주는 해방감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장소다. 도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세상이 나에게 부여했던 복잡한 수식어들은 도복의 흰색 아래로 함몰된다. 사회에서는 누군가를 책임지는 리더이거나 평가받는 위치에 있을지라도, 매트 위에서는 그저 단정하게 띠를 매고 정좌한 한 명의 수련생일 뿐이다. 이 단순함이야말로 현대인이 잃어버린 가장 거대한 사치다.
이곳에서의 관계는 수평적이고 담백하다. 회사라면 마주 앉아 대화할 일이 없었을 까마득한 후배나, 나이 차이가 큰 어르신과 나란히 서서 기합을 넣는다. 서로의 직업도, 연봉도, 학벌도 중요치 않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내지르는 주먹의 궤적과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만이 서로를 신뢰하게 만드는 유일한 척도가 된다. 학교나 회사가 ‘무엇을 가졌는가’로 사람을 줄 세운다면, 도장은 ‘어떻게 스스로를 극복하고 있는가’를 공유하며 느슨하지만 단단한 연대를 형성한다.
또한, 신체적 몰입은 지친 정신을 치유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다. 종일 모니터 앞에서 숫자와 글자에 시달리던 뇌는 발차기 한 번에 실리는 무게중심에 집중하는 순간 비로소 휴식을 얻는다. 복잡한 기획안은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많지만, 수천 번 반복한 옆차기가 마침내 목표 지점에 정확히 꽂히는 감각은 배신하지 않는 성취감을 선사한다. 띠의 색이 조금씩 짙어지는 과정은 정체된 것 같은 나의 삶이 사실은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는 시각적인 위로가 된다.
결국 학교와 회사 밖의 커뮤니티는 나를 보호하는 ‘완충 지대’다. 삶의 한 축이 흔들릴 때, 나를 지탱해 줄 또 다른 뿌리가 다른 흙에 박혀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용기를 준다. 도장에서 얻은 팽팽한 에너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드는 회복 탄력성의 근원이 된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이름 뒤에 붙는 직함이 아닌, ‘도반(道伴)’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의무와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의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 태권도장과 같은 제3의 공간은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일상에 새로운 채도를 더해주는 삶의 필수적인 여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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