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선과 마키아벨리적 필연성: 데이비드 브룩스의 고별사에 답함
서론: 고결한 작별인가, 무력한 후퇴인가
22년간 미국 지성계를 대변해 온 데이비드 브룩스가 뉴욕타임스를 떠나며 던진 마지막 일갈은 ‘인문학적 핵심의 상실’로 요약된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를 도덕적 가치가 실종된 ‘허무주의의 화신’이라 규정하며, 미국 사회가 더 비열하고 비관적으로 변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브룩스의 이 우아한 비탄 속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존재한다. 트럼프라는 현상은 인문학적 결핍이 낳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오히려 고상한 인문학적 수사 뒤에 숨은 기득권의 위선과 무능에 대응하기 위해 소환된 ‘마키아벨리적 필연성’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본론 1: 위선적 이상주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반격
브룩스는 에드먼드 버크의 ‘매너’를 인용하며 문화가 정치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대중이 목도한 현실은 달랐다. 소위 ‘인문주의적 엘리트’들은 고결한 언어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노래하면서도, 실제로는 세계화와 기술 만능주의 속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삶이 붕괴되는 것을 방치하거나 오히려 조장했다.
이러한 ‘위선적 이상주의’라는 악에 대응하기 위해 대중은 마키아벨리적 군주를 선택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했듯, 부패한 국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도덕적 성자가 아니라 때로는 악을 다룰 줄 아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트럼프의 거친 언사와 비도덕적 행보를 브룩스는 ‘인문학적 무지’로 치부하지만, 이는 사실 적의 가식적인 도덕적 방패를 무력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전술적 타격에 가깝다. 대중은 그가 ‘나쁜 놈’일지언정, 우리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진흙탕에 뛰어드는 ‘우리의 불한당’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본론 2: 인문학의 사유화와 실존적 마키아벨리즘
브룩스는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도덕 교육의 부활을 희망의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 여전히 ‘세련된 상류층의 교양’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결코 허무주의의 해독제가 될 수 없다. 삶의 기반이 무너진 이들에게 “어떻게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치에 불과하다.
트럼프가 보여준 마키아벨리적 접근은 지극히 실존적이다. 그는 ‘개 싸움(dog eat dog)’의 세상을 비판하는 대신, 그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제안했다. 브룩스는 이를 ‘허무주의’라 비난하지만, 절박한 이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인문학적 응답일 수 있다. 고전 속의 안티고네나 링컨을 소환하는 것보다, 당장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거대한 시스템에 마키아벨리적 ‘힘(Virtù)’으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더 강력한 구원 서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론 3: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시대의 도래
결국 이 논쟁의 핵심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라는 고전적 질문으로 귀결된다. 브룩스는 “이기기 위해 괴물이 된다면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만, 내가 간파한 트럼프의 논리는 명확하다. “적들이 이미 괴물이라면, 우리도 그에 걸맞은 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룩스가 우려하는 ‘공유된 도덕 질서의 상실’은 트럼프가 만든 결과가 아니라, 이미 붕괴된 질서의 증상일 뿐이다. 마키아벨리적 접근은 무너진 질서 위에서 새로운 기초를 닦기 위한 파괴적 공정이다. 트럼프가 케네디 센터를 장악하고 프로레슬러를 무대에 세운 것은 문화적 저속함의 표현이 아니라, 기존의 고결함이 가졌던 ‘권력적 독점’을 해체하고 새로운 국가적 서사를 강제로 주입하려는 마키아벨리적 기획으로 보아야 한다.
결론: 새로운 인문주의를 향한 제언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제 대학으로 돌아가 ‘위대한 대화’를 이어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트럼프라는 거울’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인문학이 현실의 악과 위선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마키아벨리즘은 언제나 가장 매력적인 대안으로 남을 것이다.
진정한 인문주의적 회복은 “우리는 왜 도덕적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이 냉혹한 권력의 세계에서 도덕적 가치를 지켜낼 힘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트럼프의 마키아벨리적 접근은 인문학의 실패를 알리는 조종(弔鐘)이자, 동시에 더 강력하고 현실적인 인문주의를 요구하는 시대적 비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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