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자산: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치] 95년의 마법: <위키드>가 ‘빨간 구두’를 신지 못한 이유

95년의 마법: <위키드>가 ‘빨간 구두’를 신지 못한 이유 영화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소품 중 하나인 ‘루비 구두(빨간 구두)’는 1939년 작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영화 <위키드>에서 도로시의 구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빨간색이 아닌, 원작 소설의 설정을 따른 ‘은색’으로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연출적 선택이 아니라, 95년이라는 거대한 저작권의…

95년의 마법: <위키드>가 ‘빨간 구두’를 신지 못한 이유

영화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소품 중 하나인 ‘루비 구두(빨간 구두)’는 1939년 작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영화 <위키드>에서 도로시의 구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빨간색이 아닌, 원작 소설의 설정을 따른 ‘은색’으로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연출적 선택이 아니라, 95년이라는 거대한 저작권의 장벽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1. 소설은 공유되지만, 영화는 독점된다

이 상황의 핵심은 원작 소설과 1939년 영화의 저작권 상태가 다르다는 점에 있다. L. 프랭크 바움이 1900년에 발표한 소설 <오즈의 마법사>는 이미 저작권이 만료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이다. 따라서 유니버설 픽처스는 소설의 세계관을 빌려온 뮤지컬 <위키드>를 영화화하는 데 아무런 법적 제약을 받지 않았다.

문제는 1939년 MGM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버전이다. 현재 워너 브라더스가 권리를 소유한 이 영화는 소설에는 없던 독창적인 시각적 요소들을 대거 추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빨간 구두’다. 원작 소설에서 은색이었던 구두를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테크니컬러’의 화려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빨간색으로 변경한 것인데, 이 ‘빨간 구두’라는 설정은 오직 1939년 영화만의 고유한 창작 재산으로 보호받는다.

2. ‘미키 마우스’가 늘려놓은 95년의 장벽

미국 저작권법상 기업이 소유한 저작물은 공표 후 95년 동안 보호된다. 본래 이 기간은 지금보다 짧았으나, 미키 마우스의 저작권 만료를 막으려던 디즈니의 강력한 로비로 인해 현재의 95년까지 연장되었다. 이른바 ‘미키 마우스 보호법’의 여파다.

이에 따라 1939년에 개봉한 <오즈의 마법사>는 2034년 12월 31일까지 저작권이 유효하다. 경쟁사인 유니버설 입장에서는 단 한 켤레의 구두 색상 때문에 워너 브라더스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거나 법적 분쟁을 겪을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위키드> 제작진은 1939년 영화의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설의 설정을 따라가는 전략을 택했다.

3. 저작권이 창조한 강제된 차별화

결국 95년이라는 긴 저작권 보호 기간은 <위키드> 제작진에게 ‘강제된 차별화’를 요구했다. 루비 구두뿐만 아니라 서쪽 마녀의 특정한 초록색 톤, 글린다가 분홍색 비눗방울을 타고 이동하는 방식 등 1939년 영화가 정립한 아이코닉한 이미지들을 교묘하게 비껴가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제약은 <위키드>만의 독자적인 비주얼과 미학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작권은 누군가에게는 창작의 족쇄가 되지만, 동시에 후대 창작자들이 과거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복제하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을 내놓게 만드는 강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95년의 보호 기간이 끝나는 2034년 이후에야 비로소 오즈의 모든 상징은 진정한 의미의 공공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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