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공법을 품은 무사: 사카모토 료마가 꿈꾼 ‘룰(Rule)’의 바다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는 흔히 한 풍운아의 성공담으로 읽히지만, 법을 전공한 이들의 눈에는 사뭇 다른 지점이 보인다. 이 소설은 봉건적 특권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에, ‘보편적 규범(Global Standard)’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선제적으로 체득한 한 지식인의 고군분투기이기도 하다.
1. 탈번(脫藩): 폐쇄적 질서로부터의 탈피
소설 속 료마의 행보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탈번’이다. 당시 일본인에게 소속된 ‘번’은 삶의 전부이자 법적 테두리였다. 그러나 료마는 그 울타리를 스스로 걷어찼다. 이는 단순히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라, ‘로컬(Local)의 질서’를 버리고 ‘글로벌(Global)의 질서’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특정 집단의 관습법이 아닌, 세계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2. 이로하마루 사건: 법치(Rule of Law)의 승리
국제법적 관점에서 이 소설의 백미는 단연 ‘이로하마루 침몰 사건’이다. 료마가 이끄는 해원대의 배가 거대 권력인 기슈번의 군함과 충돌했을 때, 료마는 칼을 뽑는 전통적인 무사의 방식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당시 한문으로 번역된 국제법 해설서인 『만국공법(萬國公法)』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만국의 공정한 도리에 따라 시비(是非)를 가리자”는 그의 주장은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그는 사고 현장의 증거를 수집하고 항해 규칙 위반을 조목조목 따져 물으며, 거대 권력을 논리와 증거로 굴복시켰다. 이는 일본 역사상 개인이 거대 조직을 상대로 ‘법적 근거’를 통해 정당한 배상을 받아낸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료마에게 국제법은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3. 선중팔책(船中八策): 근대 국가의 설계도
료마가 제안한 국가 개혁안인 ‘선중팔책’은 그가 단순한 혁명가를 넘어 설계자였음을 증명한다. 그는 단순히 정권을 교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회를 개설하고 전 세계의 법률을 참고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막고 ‘법에 의한 통치’를 확립하겠다는 근대적 법치주의의 선언이었다. 그는 사적인 감정이나 명분이라는 ‘쭉정이’를 걷어내고, 국가 시스템이라는 ‘알곡’을 남기고자 했다. 그가 꿈꾼 바다는 단순히 물리적인 대양이 아니라, 공정한 규칙(Rule)이 작동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4. 미완의 혁명이 남긴 유산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며 료마의 여정은 멈췄지만, 그가 남긴 ‘법치와 실용’의 정신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의 기틀이 되었다. 그는 기득권이 되어 법 위에 군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오직 새로운 질서의 문을 여는 도구로서 생을 마감했다.
마무리하며
『료마가 간다』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여전히 관습과 힘의 논리라는 낡은 틀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150년 전 료마가 품었던 만국공법 서적은, 오늘날 복잡한 국제 정세와 규제 속에서 본질을 찾으려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시대를 바꾸는 힘은 날카로운 칼날이 아니라, 세상을 관통하는 공정한 원칙과 그것을 믿는 낙천적인 용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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