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의미가 온다
1. 의미 없는 시간의 축적
우리는 본능적으로 의미를 추구한다. 질문하고, 계획하고, 목표를 향해 걷는다. 그러나 인생에는 아무리 의미를 부여하려 애써도 공허하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은 광야처럼 불확실하고 고독하며, 때로는 자기 존재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심연과도 같다.
육아는 그 대표적 시간이다. 특히 임신과 출산, 영유아 시기의 돌봄은 하루하루가 반복의 연속이다. 수면 부족, 몸의 변화, 끝없는 집안일. 생산성도, 성취도, 외부 평가도 사라진 이 시간은 어쩌면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의미 없음의 시간’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시간이 가장 큰 의미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훗날 깨닫게 된다.
2. 광야의 시간은 생명을 품는다
씨앗이 땅 속에서 썩는 시간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이 없다면 발아도 없다. 임신 또한 마찬가지다. 배 속의 태아는 열 달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그 정지된 시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형성된다.
출산 후의 육아는 어쩌면 ‘나’의 죽음과 ‘우리’의 탄생이다. 이타성과 지속적 헌신이 요구되는 시간 속에서, 내 야망은 무너지고 내 이름은 지워지며, 대신 타인을 돌보는 손이 나의 새로운 정체성이 된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잃은 것들은 곧 내가 얻은 것의 반비례 척도가 된다.
3. ‘무의미’를 견디는 힘이 ‘의미’를 만든다
철학자 니체는 “누구든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떻게’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육아의 시간은 ‘왜’를 잃는 시간이다. 도무지 이 시간의 고통과 수고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무의미를 받아들이고도 그 자리에 머무는 힘, 즉 의미 없음 속에 머무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깊은 지성이다. 그것은 지적 명료함이 아니라, 삶 전체를 신뢰하는 신비의 직관이다.
이 시간은 결국 의미를 쌓는 ‘비의미의 침전물’이다. 우리는 그것이 침잠된 후에야, 의미가 오롯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 마치 어둠을 통과해야 별빛이 선명해지는 것처럼.
4. 광야는 나를 키운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광야가 우리를 키운다. 아이를 안고 있는 동안, 우리는 다시 삶의 근본적인 리듬을 배운다. 반복과 기다림, 멈춤과 응시. 그리고 결국 ‘내가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구나’라는 자각이 찾아올 때, 삶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가 태어난다.
5. 의미의 역설
의미를 얻기 위해 의미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삶의 역설이다. ‘나의 시간’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우리의 생’이 시작된다. 의미는 즉각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시간을 지나는 자에게 나중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빛이나 가족의 웃음, 혹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내면의 평온으로 조용히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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